작별

꿈 & 이야기 2014. 3. 25. 18:58

여러분, 순서대로 줄을 서 주세요.”

 

낯선 목소리에 그는 문득 정신을 차렸다.

 

여기가 어디지?’

 

처음 보는 건물이었다. 넓고 잘 정돈되어 있는 실내, 화려하지 않지만 품위있는 장식들. 한쪽으로 나 있는 출구는 어디론가 이어지는 긴 복도로 연결되어 있었다. 묘한 빛이 가득차 있는 복도였다.

 

그곳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연령대와 차림새가 모두 제각각이었다. 멋지게 나이든 노신사, 환자복을 입고 있는 중학생으로 보이는 소녀, 삶에 지쳐있는 듯 보이는 중년 여성..

 

조금 전 말을 했던 낯선 목소리의 주인공과 그 옆의 선한 인상을 한 몇몇 사람들이 소란스런 장내를 정돈하고 어정쩡하게 서 있는 사람들을 안내하고 있었다. 그들은 명단에 있는 이름과 나이를 확인하며 사람들을 순서대로 어디론가 인도했다.

 

그는 자신이 어떻게 해서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 생각해보려 했으나 기억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침에 아내를 직장에 내려주고 출근했던 일, 늘 하던 대로 낮에 사무실에서 일하던 것 까지는 기억이 났는데 그 이후로 기억이 없었다.

 

저기요..”

 

그는 안내인으로 보이는 사람에게 말을 걸려고 했으나 그 사람은 손에 들고 있는 명단을 보며 사람들을 확인하고 순서대로 줄을 세우느라 무척 바빠 보였다. 그는 잠시 그들이 하는 행동을 지켜보며 이곳이 어디일까 짐작해보려 애썼다. 낯설지만 이상하게도 편안한 마음이 드는 공간이었다. 그때 조금 떨어져있던 다른 안내인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 올해 서른아홉 맞으시죠?”

 

그의 대답은 기다리지도 않고 안내인은 그를 복도로 연결된 문으로 안내하려 했다. 그러나 묘한 저항감이 그의 발걸음을 주저하게 만들었다.

 

어디로 가는 거죠?”

 

안내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때 그의 바지 주머니에 있던 휴대폰의 벨소리가 울렸다.

 

여보세요?”

 

울먹이는 아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신 어디야? 왜 아직 안와? 나 기분이 왠지 이상해.. 얼른 와.”

 

순간 그의 기억이 살아났다. 집으로 돌아가던 길, 눈부시게 아름답던 석양, 갑자기 중앙선을 넘어 그의 앞으로 돌진하던 트럭. 잠깐의 충격과 그 이후의 고요..

 

그제서야 그 공간의 묘한 비현실적인 느낌이 무엇 때문인지 알 것 같았다. 아마도 그곳은 이계(異界)로 가는 터미널 같은 곳이었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그에겐 시간이 별로 없었다. 어떻게 연결된 것인지는 모르지만 마지막 통화일 이 전화도 저 복도로 들어서면 끊어질 터.

 

아직 못다한 얘기가 많았다. 아직 해야 할 일들도 있었다. 몸이 약해 늘 피곤해하는 아내, 늘 덜렁대며 물건을 놓고 다니는 아내의 곁에 오래오래 머물며 챙겨주어야 했다. 멋지게 커가고 있는 딸아이의 결혼식에서 딸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고 싶었으며, 한창 총에 관심이 많은 아들 녀석이 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되면 하루 날잡고 종일 대부 삼부작을 함께 보기로 한 약속도 아직 지키지 못했다. 딸이 제 모습을 그대로 빼닮은 아이를 낳고 키우며 힘들어할 때 걱정할 것 없단다. 나도, 네 엄마도, 너도 그렇게 컸단다.’ 하고 위로하고 싶었고, 나보다 키가 훌쩍 더 커질 아들이 나를 팔씨름으로 이길 날을 기쁘게 기다리고도 싶었다.

아직 못다한 일이 많은데, 참 부족한 남편이고 아비였는데 이젠 시간이 없다. 이럴 줄 알았다면 가족을 위해라며 일하기보단 그들과 함께 시간을 더 보냈을 것을.. 후회는 언제 해도 늦다.

 

안녕 여보.. 저 복도 너머에서 당신 기다리고 있을게. 그렇다고 너무 빨리 따라오진 말아, 아이들 커가는 모습 보고, 손주들이랑 많이 놀아주고 내 몫까지 충분히 살고 늦게 늦게 와.. 난 당신 기다리는 거 하나도 안지루할거야.’

Posted by 안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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