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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로

꿈 & 이야기 2017. 3. 21. 20:46


요즘은 별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어쩌다 초저녁 달 주위에 금성이라도 보이면 어찌나 반가운지.. 내 어린 시절엔 그렇지 않았었다. 겨울철 이른 저녁을 먹고 마당에 나와 보면, 하늘 가득 메운 별이 쏟아질 듯 가까워보였다.

 

태어나고 60갑자 한 바퀴를 돌아 다시 용띠해가 된 지금, 나는 또 다시 마당 평상에 걸터앉아 하늘을 보고 있다. 몇 년 전 이른 은퇴를 하고, 아내가 다니는 시골 초등학교 근처에 마련한 집이다. 비교적 이른 나이에 결혼해 낳은 두 아이는 각자 독립을 했고, 아내와 나는 오래 미루어왔던 마당이 있는 집의 로망을 실현했다. 물론 그 로망에 100퍼센트 부합하는 결과물은 아니었지만..

 

나는 아내가 출근하고 나면 대충 아침 먹은 것들을 치우고 집을 정리한 후, 주로 마당에 나와 시간을 보낸다. 작은 라디오를 틀어놓고 책을 읽거나, 커피를 내려 마시며 바람을 쐬면 시간이 참 잘 간다. 요즘 보기 드문 싸리나무 울타리로 둘러싸인 작은 마당 한 쪽엔 족보를 알 수 없는 누렁이가 주로 누워 시간을 보낸다. 동네 교회 어른이 키우다 돌아가시면서 돌볼 사람이 없게 된 녀석을 몇 달 전 거둬들였는데, 이젠 내가 그 녀석과 꽤 교감을 하며 도움을 받고 있다. 태생이 애완견이 아닌 녀석은, 무심한 듯 적당한 거리를 두며 우리와 공존하고 있다. 예전 내가 어렸을 땐 부모님이 남은 밥을 끓여 개밥을 줬었지만, 지금의 나는 그냥 사료를 사다 먹인다. 가끔 저게 무슨 맛일까 궁금할 때도 있다.

 

아내는 오늘 회식이라 늦는다고 했다. 전화를 한 번 해봤지만 여태까지 그래왔듯 한 번에 전화를 받는 일은 별로 없다. 별 일 없겠지 싶어 그냥 뒀다. 잠시 후 전화벨이 울려 아내인가 싶었는데 받아보니 아들 녀석이다. 어느새 삼십대 중반이 된 녀석이지만 아직도 아이 같은 느낌이다. 몇 마디 안부를 물은 녀석은 전화를 끊었고, 나는 전화기에 저장해 둔 녀석과 제 누나가 교복을 입고 있는 사진을 찾아보았다. 증명사진 찍는 아이들을 따라가 사진관 벽면을 배경으로 내가 찍어줬던 사진이다. 그 이후로 전화기를 여러 차례 바꿨지만 아이들이 어리고 아내와 내가 젊었던 시절의 사진들은 계속 옮겨 저장해두고 가끔 꺼내본다.

 

혼자 거하게 저녁 챙겨먹기도 귀찮고 해서 손에 들고 나온 맥주가 벌써 두 캔 째. 아내가 운전을 하지 않던 시절 같으면 아내를 데리러 가느라 참아야 했겠지만, 시골로 내려오면서 아내는 손수 운전을 해 다니기 시작했다. 시골길이라 자가용이 아니면 교통편이 좋지 않기에 불가피한 측면도 있었지만, 그보다 내게서 독립하고자 하는 생각도 있었을 것이다.

 

내가 먼저 세상을 뜬다면 아내 혼자 이 집에 살긴 힘들 것이다. 그땐 다시 딸아이가 사는 곳 근처에 집을 구해 올라가라고 얘기해 두었다. 속 깊은 딸아이는 말은 살갑게 하지 못하더라도 제법 알뜰히 제 어미를 챙길 것이다.

 

아직 평상에 누워 자기엔 쌀쌀한 날씨지만, 누워서 별을 보고 있자니 술기운이 올라 잠이 온다. 까무룩 잠이 들려는 찰나, 마을 초입에 아내의 SUV 엔진소리가 들리고 곧이어 헤드라이트 불빛도 보인다. 여태 나는 없는 사람 취급하던 누렁이도 차 소리를 듣고는 일어나 주인 맞을 준비를 한다. 역시 짐승들은 권력서열에 민감하다.

 

아내가 차에서 내린다. 이제는 주차도 제법 잘 한다. 나는 아내에게 다가가 가방을 받아든다. 20년 전에 내가 생일선물로 사준 가방인데, 이 낡은 것을 용케 버리지 않고 아직도 들고 다닌다. 다음 생일엔 좀 더 비싼 가방을 하나 사줘야겠다.

 

당신, 저녁은 먹었어?”

 

, 피곤하지? 얼른 들어가자..”

Posted by 안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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